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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by Skysketcher 2020. 7. 20.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너였구나

나의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 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다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사라졌지만

또 그대로인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 새의 날개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 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겨울 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류시화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최근들어 시집을 자주 읽는다. 단어, 문장 하나하나가 새롭고 표현력에 늘 감탄한다. 일반 서적, 뉴스 기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로운 문체도 좋고 시인 개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엿볼 수 있는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엔 늘 시를 분석했었다. 특히나 고전시가는 내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가 불가능했고 모의고사를 보면 늘 고전시가 파트에서 반타작 이상으로 틀렸었다. 사실 뭘 그렇게 분석하면서 문제를 맞췄어야됐는지 아직도 의문이 든다. 당연 수능을 위해서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꼬아서 문제를 냈었어야 됐나 싶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고전시가는 하나도 없다.


성인이 되서 시를 마주하면 문제를 맞추기 위한 배움은 접어두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것 같다. 같은 슬픔의 감정도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따라 시인은 시를 만들고 나는 단순히 일기 밖에는 쓸 수가 없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쓰면서 지우고 다시 쓰는걸 반복하고 있는데 시인은 얼마나 많은 퇴고를 했을지 이 시를 여러번 읽으면서 더 궁금해진다.


이렇게 밤마다 시 하나씩 읽으면서 하루하루를 마무리 하려고 한다. 복잡한 마음도 진정되고 차분해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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